사치는 부패보다 더 나쁘다
1. 베트남 호찌민 주석은 소탈하고 검소했다. 식사는 주석 집무실에서 약 100m 조금 더 떨어진 식당에서 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식사 담당하는 병사가 말했다.
“아저씨, 오늘 비가 오니 저희들이 식사를 가져오겠습니다.”
“너희들이 식사를 가져오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고, 아저씨는 식당에 혼자 가면 된다.”
병사 한 사람은 식사를, 한 사람은 우산을 들기에 두 사람이 수고해야 하고, 자신은 혼자 우산 쓰고 식당에 가면 된다는 뜻이었다.
젊은 병사가 한 나라의 주석을 아저씨라 불렀다. 호찌민은 자신에게 주석이니 수령이니 민족의 태양이니 하는 경칭을 쓰지 말고 박(Bac: 백부, 아저씨)이라고 불러라 했다.
국가 공식적인 명칭은 '주석 호찌민'이지만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민은 호찌민을 '박 호( Bac Ho 호 아저씨)'라고 친근하게 불렀다. 자신 스스로도 아저씨라 했다.
2.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봄, 남베트남 3대 저항단체의 하나인 ‘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의 타오 의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 하노이를 방문했다.
하노이에 도착한 타오와 연맹원들은 마치 국빈 못지않은 예우를 받고 놀랐다. 북베트남 정부는 모든 일을 잠시 멈추었고, 인민 모두는 남쪽 대표단 일행을 열렬히 환영했다.
대표단은 호찌민 주석을 예방할 예정이었다. 호 아저씨는 그답게 대표단이 주석 관저로 예방하는 것을 사절했다. 호 아저씨는 타오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 자랑스런 남부 인민대표가 일부러 찾아올 것이 아니라 방문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준다면 자기로선 명예로운 일이라고 타오 의장에게 알렸다.
그날 저녁,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아 내방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에 호 아저씨는 대표단 숙소에 불쑥 나타났다. 수행원은 한 사람도 데려오지 않았고, 방문하는데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었다. 마치 친구나 가족을 만나듯이 호 아저씨는 대표단 숙소 뒷문으로 살며시 들어왔다.
숙소에 들어간 호 아저씨가 처음 만난 사람은 거울 앞에서 마무리 화장에 여념이 없었던 타오 대표의 부인이었다. 부인은 이 귀중한 손님이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부인은 가냘픈 할아버지가 누군가를 알고는 놀라움의 눈물이 넘쳐 모처럼 화장한 얼굴을 망쳐버렸다.
부인은 남편과 다른 대표를 큰 소리로 불렀다. 아주 수수하게 이웃사람을 사귀듯 한 호 아저씨의 방문에 대표단 전원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감동했다.
이 에피소드는 돌아온 대표단의 입을 통해 남베트남에 퍼졌다. 호 아저씨가 지닌 따뜻하고 소박한 인간미에 감동한 사람은 타오 부인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저항 세력의 모든 지도자도 마찬가지였다.
호 아저씨에게 화장에 몰두한 모습을 보인 타오 부인은 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 후 두 번 다시 화장품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3. 호 아저씨의 주석궁은 거실과 집무실이 각각 5평도 채 안 되었다. 소박한 거실과 집무실에 남긴 물질 유산은 이렇다.
책상과 의자 하나씩, 책장 하나, 책 몇 권, 카키색 인민복 2벌, 모자 한 개, 고무 샌들 한 켤레, 펜 한 자루, 라디오 한 대, 골동품 시계 하나, 타자기 한 대였다.
호 아저씨에게는 하나라도 빠지면 하루를 버틸 수 없는 필수품들이었다. 지배자(Ruler)가 아닌 영도자(Leader)가 남긴 ‘아름다운 빈손’이었다.
호 아저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치는 부패보다 더 나쁘다!”
노숙인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사치를 이토록 경멸한 정치 지도자가 인류 역사에 또 있었을까?
우리 지배자의 부인이 수행원 십 수 명을 거느리고 외국에서 천박한 사치를 벌이다가 외국 언론의 소문거리가 되었다니...
호 아저씨가 불현 듯 생각이 났다.
<송필경의 '페북' 중에서>